양현재단(최은영 이사장)은 2010년 7월 7일
이주요(Jewyo Rhii)를 제 3회 양현미술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한국출신의 설치미술가 이주요는 10월 8일
한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양현미술상의 영예로운 수상자가 되었다.
이주요는 1998년부터 약 5년간의 작품들을
전시공간에서보다는 작품 탄생의 환경과 점차적 시간의 흐름이 드러나는 책으로 소개하였다.
자신이 처한 물리적, 정신적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한 사람의 절실한 노력이 사진과 드로잉, 독특한 만들기의 형식 속에서 유머러스하게 드러나는 세 권의 아트북을 출간했고,
그 후 많은 전시 활동을 하게 된다.
지난 십 여 년간 여러 나라의 다른 도시들로 이주하면서 경험한 타지의 문제와 그 개별 존재의 불안, 분노, 부족, 약함 등을 작가는 비정형적 설치방식,
오브제와 드로잉을 통해 표현해 왔다. 특별한 운명에 대해서, 타인의 인생과 작가의 지속되는 삶이 맺는 특유한 관계에서 비롯된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최근 작업의 특징으로 두드러진다.
이주요는 사진과 드로잉, 독특한 만들기 방식의 작업을 보여주는 작가이다. 비정형적 설치 방식과 아트 북을 통하여 작품을 소개하였으며,
불확실성과 연약함 등을 어눌하고 유쾌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이스탄불 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등에 참여하였으며
네덜란드의 드 아펠(De Appel)과 반아베뮤지엄, 일본 오페라시티, 미국 레드캣(REDCAT) 등에서 전시하였다.
이주요는 2010년 양현미술상 수상식과 동시에 서울에서 오픈 스튜디오 Night Studio를 개최하여 삶 속에서 심미적, 의미적 선택을 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작가가 지내온 시간의 기록과
행위의 결과물들을 관객이 함께 경험할 수 있게 하고자 마련하였다.
타인의 사적 공간을 방문하는 것은 생경하면서도 불편한 경험이지만 한 예술가가 자신을 둘러싼 삶과 환경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일상과 관계 맺는 소박하고 비밀스러운 장면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주요는 주어진 조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적응해가는 일환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미술의 소재로 사용한다.
이번 오픈 스튜디오는 작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갖가지 오브제의 탄생과 시간이 흐르면서 오브제들이 변화 및 변용되는 시공간의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시 형식이다.
2007년 이스탄불 비엔날레에서 첫 대면했던 순간부터 올해 39세의 작가 이주요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이후 두어 번 서울에서 그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듯 하지만 동시에 매우 섬세하고 연약한 감성은 지속적인 흥미를 자아냈고, 이것은 비디오, 드로잉, 조각, 퍼포먼스 등을
아우르는 그녀의 다양한 작업들을 통하여 너무나 아름답게 형상화되었고 동시에 그 가운데 녹아 있다.
이주요는 활동 반경이 넓은 작가이다. 네덜란드 라익스 아카데미, 이스탄불 비엔날레와 광주비엔날레, 뒤셀도르프 등지에서는 물론,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등 미국에서도 그룹전과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작품 전반을 통하여, 그리고 사실상 현재 진행중인 프로젝트로서의 이주요 작품은 지난 2004년 작고한 선배 작가 박이소의 작품에 대한 느슨한 재해석이다.
박이소의 작품에 대한 기억, 아니 어쩌면, 원본성(originality)에 대한 모더니즘의 숭배가 허구적 신화에 불과하다는, 이주요 세대의 수많은 작가들이 공감하는 그 믿음이 그녀 작업의 토대를 이룬다.
오해가 오히려 의사소통의 주요 요소라는 박이소의 생각에 비추어 본다면, 선배 작가의 작품을 충실히 따르는 이러한 오(吳)-차용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 된다.
암스테르담에서 제작된 작품은 그 곳에서 먼저 전시되었다. 각각의 작품 옆에는 작가의 작품 설명을 듣고 본인이 이해한 (그리고 그럼으로써 박이소의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초상, 혹은 또 다른 재현이 되는)
바를 적은 한 동료의 메모가 붙어있다. 이 해석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패러독스를 보여준다.
즉 원작은 뒤로 후퇴하지만 그 감정적 핵심은 강화되는 것이다. 여러 오브제들은 빈번히 배치를 달리하며 전시되곤 하는데, 이는 고정된 의미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원형으로 오브제들이 배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전과 동일한 배치도 종종 등장한다. 기억은 농간을 부리고 때로는 새로운 창조의 물고를 트도록 영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의 사활 여부는 언제나 불확실성 위에 놓여있다.
암스테르담에서 마지막 전시를 마치고 2년 뒤인 2005년, 다시 짐을 꾸릴 때가 왔다. 그녀는 작품들—해외에서 전시를 하느라 조금씩 파손되어 돌아온 것들을 포함하여—을 다섯 대의 짐수레에 나눠 실었다.
그리고 반나절 동안 이 새로운 작품 배열을 힘겹게 밀면서 아카데미 건물을 돌아 그녀가 원래 출발했던 곳, 작업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착잡해진다.
얼마 못 가 이것들이 전부 쓰레기 더미가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침 그 때 서울에서 한 큐레이터가 찾아와 전시를 제안한다.
이후 작품들은 어느 호의적인 화랑관계자의 다락으로 옮겨지고, 그 곳에서 또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그 전시는 취소되었고 이주요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내 작품들을 살리는데 실패했어.” 그렇지만 다시 며칠 뒤 같은 큐레이터가 다른 제안을 했고, 2006년 이 옮겨온 짐수레들을 전시하게 된다.
전시가 끝나자 작품들은 다시 짐으로 꾸려져 다른 전시, 다른 배치로 옮겨갔다. 그리고 2007년 “십 년만 부탁합니다 Ten Years, Please” 전에서 이 작품들은 마지막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전시가 열리던 2주 동안 관람객은 전시된 작품 가운데 한 점을 골라 1년 동안 맡아주는 수탁인이 되는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수탁인의 선정은 작가와의 친분, 작품을 보관하거나 전시할 공간 조건, 그리고 해당 작품을 신청한 이유 등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작품의 포장과 배달이 완료되고 나서 작가는 위탁계약서,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그 작품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묘사한 사진과 드로잉을 곁들여 각 작품의 내력을 손수 기록한 서류를 수탁인들에게 건넸다.